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교(Pontifical Gregorian University) 건물 4층의 아울라 디 테올로지아(Aula di Teologia, 신학 강의실). 햇빛이 유난히 따뜻하던 날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수백 년 된 벽돌을 황금색으로 물들였고, 공간에는 오래된 신학서와 석조 벽이 풍기는 진하고도 무거운 냄새가 가득했다. 이 방은 세기를 거쳐 수많은 영혼들의 회의(懷疑, doubt)와 질문을 들어온 곳이었다.
"베리타, 신앙(信仰, faith)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루이지 추기경(Monsignor Luigi)은 창가에 선 채 그렇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차분했다. 마치 깊은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처럼. 베리타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답할 필요가 없었다. 루이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이미 보인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루이지는 돌아서며 베리타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항상 뭔가가 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을 본 사람처럼. 하지만 그 눈은 결코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너무나 따뜻해서, 베리타는 때로 그 온기가 자신을 태워버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스승님은 무엇을 보셨나요?"
베리타가 물었다.
루이지는 웃었다. 그의 웃음도 종소리 같았다.
"네가 알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도 같은 것을 보게 될 거야."
베리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루이지가 무엇을 본다는 것인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루이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질문이 필요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인가요?"
베리타가 조용히 물었다.
루이지는 웃음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마치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네가 준비되면.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할 준비가 되면."
베리타의 가슴이 철렁했다. 루이지의 말이 예언처럼 들렸다.
"그게 무섭습니다."
베리타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루이지는 돌아서며 베리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오래된 은 십자가가 있었다.
"두려움이 있어야 지혜가 있다. 이것을 가져라.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이것은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베리타는 십자가를 받았다.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무게만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함께 전해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는 것을 베리타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그 말이 매일 밤 꿈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루이지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창밖의 햇빛도 변하지 않는다. 마치 시간이 거기에 갇혀 있는 것처럼. 베리타는 그 꿈을 몇 백 번 반복했다. 루이지의 말을 몇 백 번 들었다. 하지만 매번 깨어날 때마다, 그 말의 의미는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엔 희망 같았고. 이제는 저주 같다.
베리타의 눈이 떠졌을 때, 천장은 낡은 회색이었다.
반년 전처럼. 1년 전처럼. 매일 아침처럼.
루이지와 함께하던 그 따뜻한 아울라 디 테올로지아의 황금빛 햇빛은 여기에 없었다. 이곳은 빛 자체가 다른 색이었다. 침울한 회색. 서울의 건설 크레인과 낡은 건물들을 통해 필터링되어 들어오는, 생기 없는 빛. 방은 좁았다. 10평도 안 되는 원룸. 한쪽 벽에서 반대 벽까지 몇 걸음 안 되는.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움직임은 느렸다. 마치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서울의 이 좁은 방은 항상 춥다. 난방비 때문에 히터를 틀지 않은 지 이미 두 달째다. 옷가지는 침대 옆 종이박스에 잡다하게 쌓여 있었다. 책이라고는 한 권도 없었다. 신학서로 가득했던 바티칸의 도서관과는 전혀 다른 공간. 매달 월세 내기도 빠듯한 상황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은 회색이었다. 건설 크레인, 낡은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뭔가를 향해 급하게 움직인다. 베리타만 제외하고.
휴대폰에는 알람이 울렸다. 8시다. 오늘도 성당에 가야 한다.
베리타는 강동진 신부에게 신학생 신원으로 조용히 거둬졌다. 공식 기록도 없다. 그저 도움이 필요한 젊은 여인. 그것으로 충분했다. 신부는 물어보지 않았다. 베리타도 설명하지 않았다. 침묵이 가장 깊은 이해였다.
베리타가 옷을 입으면서 거울을 마주쳤다. 거울 속의 여인은 낯설었다. 20세인데 30대처럼 보인다. 눈 아래 검은 그림자. 입술의 생기 없음. 마치 누군가의 손에서 생명을 빨려나가고 있는 것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강동진 신부였다.
"베리타. 오늘 혹시... 시간이 있나?"
목소리에 뭔가 있었다. 베리타는 그것을 알아챘다. 망설임. 아니, 죄책감.
"네."
"누군가가 도움을 청했다. 작은 일이야. 보수는... 괜찮을 거야."
보수. 그 단어가 베리타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베리타는 다시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여인은 여전히 낯설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익숙했다. 낯선 자신과 살아가는 것이 이제 그녀의 삶이었으니까.
베리타는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 그것은 루이지가 자신에게 준 것이었다. 수십 년 된 은 십자가. 영혼이라도 들어있을 것 같은, 무겁고도 차가운 것.
손가락이 그것에 닿는 순간, 죽음의 냄새가 흘러들었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죽어간다.
아니, 이미 죽어있다.
베리타는 그것을 알았다. 마치 루이지의 목소리처럼,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죽음의 신호.
그녀는 십자가를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네가 알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도 같은 것을 보게 될 거야"
루이지의 말이 맞았다.
베리타는 같은 것을 봤다. 같은 것을 본다. 매일, 밤마다, 누군가의 죽음을.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가방을 메고, 문을 나가는 베리타의 눈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관 속에 갇힌 것처럼, 검고도 깊었다.
서울의 거리는 여전히 회색이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