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동진 신부는 항상 정확한 시간에 들어섰다. 오전 9시 30분. 미사가 끝나고 추운 공기에 하얀 입김을 뿜으며 신자들이 나간 지 20분 정도 지난 다음이었다.
"베리타. 잘 지냈나?"
강동진 신부가 옆에 섰다. 손에는 낡아서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보온병이 들려있었다.
"네, 신부님."
베리타는 성당 벽감의 성모상 앞에 놓인 촛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을 멈추지 않았다. 촛불 세 개가 아직도 타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이 간절한 어깨로 계속 기도 중이었다.
강동진 신부가 보온병을 베리타 옆에 내려놨다.
"끼니 거르지 말아야지. 얼굴 많이 수척해졌어."
베리타가 돌아섰다. 신부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미안한 것처럼.
"괜찮습니다."
"시간이 좀 있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 좀 난처한 상황이야..."
말을 흐렸다. 신부의 손이 성모상을 스쳤다. 마치 누군가를 대신 위로하듯이.
"알겠습니다."
강동진 신부의 사무실은 성당 지하 1층에 있었다. 오래된 목재 책상, 낡은 의자 두 개, 창문은 없고 벽에는 십자가만 걸려있었다. 신부는 문을 닫고 베리타를 마주보게 앉혔다.
"신자 이미라 씨라는 분이 있어."
신부는 말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우리 성당에서 20년을 다니신 분이야. 참 오래 뵌 자매셨어. 남편분과 한 마음으로 여기 다니셨고... 우리 성당이 자리잡는 걸 많이 도와주셨지."
신부는 잠시 손을 모았다. 마치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65세시네. 양평에 있는 요양병원에 계셔. 그런데 지난 한 달 전에... 남편분이 돌아가셨어."
베리타는 신부의 얼굴을 봤다. 신부가 말하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외국 주재원으로 오래 일하셨던 분이야. 회사 때문에 부부가 2년을... 떨어져 살아야 했어."
신부가 말을 멈췄다.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게 말이야, 할머니가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 남편이 말레이시아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했는데 최근 2년 동안 찾아오지 않았거든. 총 4년간 외국에 계셨는데 귀국이 점점 뜸해지다가 마지막 2년은 아예 오시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사업하시는 게 잘 안 된다며 전화도 잘 안 하셨던 모양이야."
신부가 천천히 말했다.
"할머니가 남편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심을 많이 하셨어. 남편이 외국에서 바람이 난 건 아닐까, 그래서 찾아오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
신부가 베리타를 바라봤다.
"2년을... 그런 생각 속에서 누웠던 거야."
"그래서 신부님이 오신 건가요."
"응. 그런데 직접 올 수는 없어. 거동이 힘드시거든. 척추 손상으로 2년을 누워만 지내셨대."
베리타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움직였다. 볼펜을 집었다 놨다. 다시 집었다 놨다. 신부는 베리타의 손을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아드님이 유품을 가져오기로 했어. 혹시 자네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아드님이에요?"
"응. 이준혁 씨라고 변호사야. 다음 주에 온다고 했어. 아니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신부는 책상 위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길었다. 30년을 기도로 마모된 손이었다.
"할머니가 하도 괴로워하길래... 아드님도 어쩔 수 없이 의뢰를 하신 것 같아."
베리타가 신부의 손을 봤다. 그 손에 묻어있는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강동진 신부는 40년을 이 성당에서 보냈다. 그의 손은 수만의 신자들을 축복해왔다.
"말하기 좀 어려운 부분인데..."
신부가 다시 말했다.
"장례를 치르고 보니 남편분이 생각보다 재산을 많이 남기셨대. 그 돈이 다 할머니한테 갔다고 해. 그래서 더 헷갈리는 거 같아. 바람을 피우셨으면 돈을 물려줄 리 없지 않나 싶으시는 거지."
신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데 할머니는 그걸로도... 남편이 바람 피운 게 아닌지 의심을 완벽하게 지우지 못하시는 것 같아. 그래서 도움을 청했어. 의심 속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이준혁은 정확히 오후 3시에 들어섰다.
밝은 색 양복을 입은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검은 머리는 깔끔하게 빗어져 있었고, 손목에는 고급 시계가 차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의 옷처럼 정돈되지 않았다. 피로가 뚜렷했고, 그 밑에는 의심이 깔려있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목소리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톤이었다. 점잖지만 거리감이 있었다.
"준혁이. 이분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이야."
베리타는 이준혁을 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상자를 봤다. 상자는 평범했지만, 그것이 담은 것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이렇게 직감되었다.
이준혁이 상자를 책상에 놓으며 베리타를 평가하듯 봤다. 눈빛이 분명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는 뜻.
"혹시 점쟁이를 모시고 온 건가요? 아니면..."
"준혁."
강동진 신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끊었다.
이준혁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입가의 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하도 힘들어하시길래..."
이준혁이 이어 말했다. 목소리에는 합리성이 있었다. 변호사의 음성이었다.
"아버지가... 바쁘다는 이유로 2년이나 귀국을 안 하셨거든요. 말레이시아에 있으면서. 어머니가 척추를 다치셔서 병원에 가야 한다는 걸 아시면서도."
이준혁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어머니 편찮으신 정도로는 오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도대체 일이 그렇게 바빴던 건지..."
말을 끝내지 않았다. 끝낼 필요도 없었다. 얼굴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의심, 어머니에 대한 연민,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무력감.
"보수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이준혁이 돈 얘기를 꺼냈다. 금전적 측면으로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생각보다 재산을 많이 남기셨거든요. 어머니가 다 받으셨고, 저도 충분히..."
말을 흐렸다. 쑥스러워 보였다.
"아무튼 충분히 해드리겠다는 겁니다."
베리타는 상자를 봤다.
"언제부터 시작하실 수 있어요?"
베리타가 잠시 생각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바로는... 너무 많이 들어올 수 있거든요."
이준혁이 놀란 표정으로 베리타를 봤다. 처음으로 베리타의 얼굴을 직접 마주쳤다.
베리타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누군가의 마음을 읽은 사람의 표정처럼.
이준혁이 떠난 후 강동진 신부가 상자를 베리타 앞으로 밀었다.
"할머니는 서울이 아니라 양평에 계신 거군요."
신부가 중얼거렸다.
"응. 거동이 힘들어서 서울에 올 수 없다고 했어. 준혁이도 변호사 일로 바쁜 데다..."
신부는 말을 멈추고 베리타를 봤다.
"어쨌든, 이게 할머니가 남편의 진정한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상자 안에는 세 개의 물건이 있었다. 손목시계, 묵주, 그리고 개봉하지 않은 편지.
베리타의 손가락이 시계 쪽으로 움직였다. 순간 그녀의 호흡이 변했다. 얕아졌다. 물속에 빠진 사람의 호흡처럼.
강동진 신부는 베리타의 손을 멈췄다.
"아직 만지지 말아. 너무 많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베리타의 손가락이 시계 1센티미터 앞에서 멈췄다.
"이 시계는 결혼기념으로 산 거라고 했어. 30년 결혼 생활이었나. 남편분이 소중하게 여기셨거든."
신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외국에서 해가 지고 떠오르는 것을 이 시계로 봤을 거야. 몇십 년을... 그 손목에서 똑딱거리고 움직였을 시간들."
신부는 잠시 멈추고 묵주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건 묵주야. 남편분이 매일 손에 들고 다니셨던 거지. 신앙 깊으신 분이셨거든. 기도할 때마다 이 구슬들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갔을 거야."
베리타가 손을 내렸다.
강동진 신부는 창밖을 봤다. 지하 사무실이지만,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은 검은 흙과 콘크리트 벽뿐이었다. 무덤처럼.
"할머니는 남편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어. 2년을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어. 그리고 남편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상태야."
"그래서 물건으로 봐야 하는 거죠?"
베리타의 질문이 조용했다.
"그래. 물건이 말해주는 걸."
강동진 신부가 다시 베리타를 봤다.
"할머니가 남편의 진정한 마음을 알면... 더 실망하시진 않을까?"
베리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자 위에서 시계와 묵주와 편지가 침묵으로 빛났다.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