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손 끝에 보이는 죽음」 에피소드 1-2: 침묵 속의 2년

728x90
반응형

지하철을 타고 언덕배기를 한참 걸어 올라온 원룸은 여전히 춥고 좁았다.

 

베리타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모르는 사람의 사연을 듣는 것은 감정 소비가 컸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의심, 누군가의 상처—그것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은 자신을 비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장 다음 달 월세를 내려면 일이 필요했다.

침대 옆 책상에 앉았다. 휴대폰으로 계산을 했다. 월세 45만 원. 관리비 5만 원. 이미 밀린 월세가 2개월. 손가락이 화면 위를 슬라이드했다. 통장 잔액은 12만 원이었다.

 

상자는 침대 옆에 놓여있었다.

베리타는 그것을 바라봤다. 베이지색 골판지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모서리는 닳아서 색이 변해있었다. 여러 번 옮겨졌던 흔적이 보였다. 평범한 종이상자였다. 아무것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 담긴 것들은 그렇지 않았다.

 

촛불을 켜기로 마음먹었다.

책상 서랍에서 양초를 꺼냈다. 성당 벽감에서 본 것처럼 흰색 촛불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태워지는 촛불. 베리타는 촛불을 책상 위에 놓고 불을 붙였다.

불이 살짝 흔들렸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창문 위쪽으로 아파트 외벽의 가로등 불이 보였다. 반지하가 아니라 원룸이라도 이곳은 여전히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베리타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곰팡이 얼룩이 보였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습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한 시간을 그렇게 있었다.


밤 11시가 넘었을 때 베리타는 일어났다.

촛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병 안에 반쯤 녹아내린 촛농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자를 열었다.

손목시계가 가장 먼저 보였다. 검은 가죽 줄에 매달린, 그리 크지 않은 은색 시계였다. 오래되어 보였다. 하지만 깔끔하게 관리된 흔적이 있었다.

 

베리타는 숨을 들이키고 시계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금속에 닿는 순간, 세상이 변했다.


한참 눈 앞이 컴컴하더니 큰 건물의 자동회전 문이 열리는 것이 보인다. 유리 건물의 로비다. 사람들이 빠르게 걸어간다. 구두 소리. 말소리. 누군가의 손목에 시계가 반짝인다.

 

"미스터 이, 아직도 안 가세요?"

 

누군가의 목소리다. 영어다. 하지만 정확한 발음이 들리지 않는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사무실 안이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남편이 혼자 앉아있다. 벽에는 시계가 달려있다. 밤 11시.

 

"이 계약서, 뭐 이렇게 문제가 많아? 다시 작성해. 명일까지."

 

누군가와 전화 중이다. 목소리가 높다. 답답한 목소리다.

 

"예, 확인하겠습니다."

 

시계 주인인 듯한 사람이 대답한다. 피곤이 느껴지는 목소리.

 

시계가 움직인다.

 

밤 12시.

밤 1시.

 

휴대폰이 울린다. 여자의 얼굴이 화면에 뜬다. 할머니다. 아니면 누군가. 얼굴이 분명하지 않다. 흐릿하다.

손가락이 화면을 스친다. 받지 않는다. 그냥 본다. 전화가 끊긴다.

 

휴대폰이 다시 울린다.

이번에는 다른 번호다.

 

"이 사장님, 당신 언제 와요?"

 

한국말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다. 젊고, 성급하고,  급한 목소리다.

 

"일이 아직..."

 

"일, 일, 일만 하네. 우리 약속 기억해요? 내일 오전까지 무조건 와야 돼. 물건도 사야 해요."

 

"내일 가려고..."

 

"오늘. 오늘 와야 돼요. 당신이 약속한 거잖아요."

 

끊긴다.

남편이 책상 위의 전화를 바라본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할머니 이미라의 프로필 사진이 뜬다. 

하지만 받지 않는다.

 

펜을 들고 계약서에 줄을 긋는다. 손이 떨려서 줄이 흔들린다.

시계가 또 움직인다. 시간들이 지나간다.


베리타의 손이 책상 위에 떨어졌다.

 

호흡이 가빴다.

5분을 그렇게 있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시계에서 흘러나온 이미지는 단편적이었다. 마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본 것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이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무엇이 부족했나?

뭔지 모르겠지만, 무엇인가가 빠져있었다. 마치 책장이 일부 떨어진 것처럼.

 

베리타는 다시 누웠다.

 

초가 타고 촛불이 이내 꺼져버렸다.

그녀의 마음도 흔들렸다.

 

아내가 의심했던 것이 맞는 건 아닐까? 남편 분이 다른 여자와?

그러면 뭐라고 말을 전해야 하나.

반응형